오늘을 살아보았지.

산이 허기지게 하다.

스푸트니크! 2004. 5. 15. 16:20

운 좋게 오전 근무만 하게됐다.

오후 시간이 완전히 공짜로 얻어진 셈이지.

그래서 산에 가기로 했다.

모자를 눌러쓰고 계족산을 올랐다.

시간이 나면,

아무 것도 안하면 미칠 것 같은 날,

산이 고픈 날이면 근처 계족산엘 올라 갈증을 해소하곤했다.

 

오늘은 그 전에 가지 않았던 길로만 골라서 올라보기로 했다.

잘 닦여진 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을 쫓지 않고

몇몇 사람의 일탈된 족적을 쫓아보기로 했다.

전혀 다른 산을 만났다.

 

소박하지만 계곡도 만나고,

나무에 올라 도토리인지 뭔지를 부지런히도 갉아먹는

다람쥐도 보았다.

녀석이 갉아대는 도토리인지 뭔지의 껍질이 눈처럼 내린다.

 

바닥엔 이미 아카시 꽃잎이 눈처럼 쌓여있다.

알싸하니 향내도 은은하다.

 

평일 낮 시간이라 그런지 낮은 곳은 사람이 많았지만

올라갈 수록 인적이 거의 없다.

 

이 산은,

아니 지금 이 길의 산은

오르지 않고 들어간다.

높아지지 않고 깊어진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인생이란 것이 높아가는 것만이 아니라 깊어지는 것임을 알아간다.

 

중간쯤 정상 비슷한 곳이 나타났고 시야가 확 트인다.

 

돌탑을 하나 쌓고 합장을 했다.

 

"시간을 아무렇게나 엎지르지 않게 해주소서."

 

합장

 

계족산성 정상에 올랐다.

포크레인으로 공사가 진행중이고,

한 옆으로 아주머니 한 분이 나물을 캐고 있다.

질경이나물이란다.

그냥 야생초인줄만 알았는데 저것도 먹는 거구나...

 

아주머니께서는 아가씨가 겁도 없이 혼자서 깊은 산엘 들어왔다며 놀라신다.

앞으론 혼자서 다니지 말라신다.

오르는 동안 호젓하니

완전히 혼자구나..

나는 없구나..

고요하구나..

그렇게만 생각했는데 아주머니 말씀에 그런건가? 싶어졌다.

 

내려온다.

 

고요하던 산길이 왠지 적막하다.

호젓하던 산길이 약간 으스스하다.

누군가가 나타날 때마다 괜히 경계한다.

 

오를 때 보이던 것들이 보이지 않는다.

오를 때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간사하구나.

 

말 한 마디에 모든 것이 전복됐다.

 

온통 혼돈이다.

 

 

배가 고프다.

그러고 보니 어제 저녁부터 밥을 안먹었군...

 

산에 대한 갈증을 해결하려 올랐던 산에서

나는 지독하게 허기가 져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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