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들
기형도
감당하기 벅찬 나날들은 이미 다 지나갔다.
그 긴 겨울을 견뎌낸 나뭇가지들은
봄빛이 닿는 곳마다 기다렸다는 듯 목을 분지르며 떨어진다.
그럴 때마다 내 나이와는 거리가 먼 슬픔들을 나는 느낀다.
그리고 그 슬픔들은 내 몫이 아니어서 고통스럽다.
그러나 부러지지 않고 죽어 있는 날렵한 가지들은 추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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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일하는 약국에 정기적으로 병원처방을 받아 오시는 할머니 한 분이 계시다.
팔순이 넘으신 할머니는 남편과 자식들을 모두 먼저 보내시고 혼자 사신다.
아주 작고 많이 굽은 등에는 언제나 할머니 몸집만한 커다란 베낭을 메고 다니신다.
저 안엔 뭐가 들어있을까..늘 궁금하기도 하다.
다음엔 뭐가 있는지 가르쳐 달라고 떼 써봐야겠다.^^
이 할머니가 오시면 아무래도 기력이며 총기가 젊은사람들만 같지 않고,
꼼꼼하게 약을 챙겨 주는 가족도 없기 때문에
가능한 쉽고 편하게 드실 수 있도록 최대한 신경 써서 약을 포장해 드린다.
어제도 여전히 커다란 베낭을 메고서 약국에 오셨다.
그런데 얼굴에, 특히 눈주위에 피멍이 잔뜩 들어있었다.
얼굴이 왜 그러시냐고 물었더니 넘어지셨단다.
에휴~ 얼마나 아프셨을까..
얼굴이 저렇게 피멍이 들 정도면 심하게 넘어지신 모양인데,
그나마 저 정도길 다행이다 여겨야 할지 참...마음이 아팠다.
넘어져 눈 앞이 캄캄해지고 일어날 기운조차 없을 때
부축해 일으켜주는 튼튼한 팔이 없고,
피멍 가득 번진 얼굴에 연고라도 발라주는 따뜻한 손이 없는 할머니께
감당하기 벅찬 날들은 다 갔다고 말 할 수 있을까.
할머니의 얼굴에 피멍이 피어나기 전에 이미
외로운 가슴엔 잊고있던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핏물로 베어나와 더 진하게 멍지고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한동안 주저앉은 채로 서러운 가슴을 쓸어내리진 않으셨을까.
지나온 나날들에 비하면 이쯤이야..하며 툴툴 털어내고 일어설 수 있을까.
슬픔의 죽은 가지들을 분질러뜨리며 다시 찾아올 봄을 기다리실까.
삶의 무게만한 베낭을 메고 다시 길을 나서실까...
뚜껑이 짝이 맞질 않는 물병을 들고 계시길래 뭐냐고 물으니
요즘들어 입안이 자꾸 말라서 물병을 갖고 다녀야 한다고 하신다.
뚜껑이 제대로 닫혀있지 않길래 단단하게 꼭 닫았다가
너무 단단하면 열기가 힘이 드실까 싶어 약간 풀어 헐겁게 닫아드렸다.
넘어지셨다는 말, 입안이 마른다는 말, 그리고 돌아서 가시는 모습이 그저 담담하게만 보여
내년 봄에 다시 씩씩하신 그 모습 그대로 보게 되길 마음으로 바래봤다.
언젠간 나도 저렇게 작고 가벼워진 몸으로 무언가로 잔뜩 채워진 크고 무거운 베낭 하나 메고 살아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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